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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째 사용중인 만년필: 파이롯트 프레라, 라미 사파리
    리뷰 2022. 2. 5. 07:16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던건 2013년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왜 만년필에 꽂혔는지 이유나 계기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날 갑자기 구매했던 파이롯트 프레라 F닙을 지금까지도 정말 줄기차게 잘 쓰고 있다.

    심지어 별로 필기라는것을 할 일이 없는 직장을 다님에도 불구하고 내 가방 속엔 늘 프레라가 들어있었다.

    (비행다니면서 브리핑룸에서 만년필 꺼내 비행노트 적었던 사람 여기 있읍니다🙋‍♀️)

    만년필이란 이름에 걸맞게 벌써 햇수로는 10년째 사용중이구나.

    잉크만 바꿔 채우면 또 새로운 맛에 질리지도 않고, 쓸때마다 만족하면서 즐겁게 필기할 수 있게 해준 필기도구다.

     

    파이롯트 프레라 / 라미 사파리


    둘다 입문용으로 많이 추천되는 무난하고 저렴한 만년필이다.

    만년필의 감성은 있으면서도 올드하지 않은 디자인이라 둘다 만족스럽게 사용중이다. (또 못생기면 안된다)

    파이롯트 프레라는 F촉(fine), 라미 사파리는 EF촉(extra fine)인데

    아무래도 일본제와 유럽제라는 차이 덕분에 프레라의 F촉이 사파리의 EF보다 오히려 훨씬 가늘게 나온다.

    나는 글씨를 작게 쓰고 세필을 좋아해서 프레라 F촉을 평소에 즐겨 쓴다. 예리한 촉이 종이 위에서 사각사각대는 느낌이 글자 적는 즐거움을 준다.

    다만 알파벳을 적을 땐 약간은 굵기가 있어야 쓰기도 편하고 가독성도 좋아서 영어를 쓸 때는 좀더 굵은 사파리 EF를 쓰고 있다.

    둘중에 더 만족스런 만년필을 고르라하면 프레라를 고를 것이다.

    프레라의 슬립온 뚜껑을 한번 스르륵 열고 닫아보면 누구라도 그 부드러운 쾌감에 반해 한마디씩 한다.

    최근 라미 사파리를 떨어뜨려 촉이 망가졌는데, 다시 사야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영문용으로 프레라 M닙을 하나 더 구매했을 정도로 만족스런 만년필이다.

    다만 뚜껑이 좀 약한것 같다. 떨어뜨린 적도 없는데 왜 어느샌가 금 가 있는지 모를..🤷‍♀️

    깨진 틈으로 잉크가 새어들어가서 보기엔 영 별로지만 뚜껑닫는 느낌이라던가 밀폐력에 큰 차이는 없는 듯해서 그냥 사용중이다.

     

    한정판 네온핑크 사파리. 그리고 아이보리 프레라. 아이보리색은 실물이랑 비슷한데 네온핑크는 실물색감이랑 하나도 안 비슷하다.

     

    야금야금 돈 먹는 취미


    만년필은 언뜻 이름만 보면 경제적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한 번 쓰기 시작하면 의외로 자잘하게 돈이 좀 들어간다.

    하긴 생각해보면 약간 사치스러운 인상이 있긴 하다.

    뭔가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깐깐하고 예민하며 섬세한, 약간 옛것을 고집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일 것 같달까- 만년필을 쓰기 전 내 인식은 그랬다.

    사실 만년필을 쓰고 있는 지금도 ㅡ 내 자신이 딱히 그렇지 않음에도 ㅡ 만년필을 쓰는 사람에 대한 그런 이미지가 약간은 남아 있다.

    몽블랑 같은 고가의 만년필이 우리의 인식 속에 일반적으로 만년필 하면 먼저 떠오르기도 하고,

    디지털로 모든걸 해결하며 페이퍼리스를 지향하는 요즘같은 세상에 만년필이라니. 내 주변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듯 한데 ㅋㅋㅋㅋ

     

    일단 만년필은 종이를 많이 탄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그냥 아무 종이에 썼더니 무슨 모세혈관 확장되듯이 글자 획마다 잉크가 미세하게 번졌다.

    어떤 종이에는 마치 유성매직으로 쓴것처럼 뒷장에 그대로 잉크가 비치기도 한다.

    유명한 몰스킨 같은 다이어리는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가 만년필 사용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가 너무 얇고 종이의 촉감 자체도 별로..

    또 어떤 종이에선 같은 촉인데 굵게 나오기도, 가늘게 나오기도 할 정도로 종이에 따라 필감이 달라진다.

    질이 안 좋은 종이를 사용하면 닙(촉) 사이에 종이 섬유질이 끼어 망가질 수도 있다고도 하니, 개복치가 따로 없다.

    그동안 내가 사용했던 노트들은 로디아, 클레르퐁텐, 무인양품 노트를 가장 많이 썼고 .. 지금은 라이프 노블 노트를 쓰고 있다.

    뭐가 제일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로디아나 무인양품이 종이질도 가격도 무난했다.

    클레르퐁텐도 좋지만 종이가 좀 푸른 편이라.. 나는 종이 색이 좀 따뜻한걸 좋아한다.

    지금 쓰고있는 라이프 노블도 아직 사용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만년필용으로 꽤 좋다고 느껴진다. 매끈해서 부드럽게 잘 써지며 잉크 농담도 잘 표현되고 번짐도 비침도 없다.

    미도리 MD노트도 유명한데, 테스트해보니 아무래도 종이가 얇아 약간 뒤에 비침이 있는듯해서 나는 아직 써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색이 배어나올 정도로 비치는건 아니고, 그냥 앞장에 글자를 썼구나 하고 알 수 있는 정도.

    잉크에 따라 '테가 뜬다'고 표현되는 특성을 가진 잉크들이 있는데, 사실 나는 워낙 세필을 쓰니까 테 뜨는걸 보기 힘들긴 하지만

    종이에 따라서도 테가 잘 뜨는지 아닌지가 결정된다고 한다. 미도리도 테가 잘 뜨는 편이라 해서 다음에는 한번 써볼까 하는 중.

     

    그리고 한번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엄두도 안나는 잉크의 세계.

    하늘 아래 같은 색 없다는 말은 색조화장품 뿐만 아니라 잉크에도 여지없이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회사의 잉크, 심지어 같은 회사의 잉크여도 색에 따라서 질감이 다르기도 하다.

    박한 잉크? 흐름좋아 콸콸 나오는 잉크? 이것들이 다 무엇인고 하니

    말 그대로 잉크가 좀 thick해서 좀 덜 흘러나오면 박하다고 표현하는듯 하고, 묽은 잉크는 흐름이 좋다고 표현하는듯 하다.

    뭐가 더 좋은건 아닌거같고, 닙의 특성이나 종이에 따라서 적합한 잉크가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그리고 이놈의 잉크 회사들은 어쩜 잉크 이름도 그리 감성적으로 잘 짓는지.. #343295 이러면 아무 느낌없이 무미건조했을 색 이름을 무슨 "달의 먼지" "녹슨 닻" "월야" "심해" 이런 네이밍을 붙이면 오덕 가슴이 두근거리겠니 안 두근거리겠니;

    다행히 나는 아직 잉크의 세계에는 발을 깊게 들이진 않았지만, 맘에 드는 예쁜 색의 잉크로 글자를 적어내려갈 때의 그 기분은 형용하기 어려운 묘한 만족감이 있다.

    나는 일단 좀 흐리멍덩하고 옅은 오묘한 색보다는 가독성이 좋고 채도 높은 청량한 느낌의 색을 좋아한다.

    만년필 잉크의 농담이 잘 보이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블랙잉크는 거의 안쓰고, 오랫동안 좋아했던 잉크는 펠리칸4001 터콰이즈.

    몇년간 만년필 잉크에 관심을 안 두고 살다가 최근 파이롯트 이로시주쿠의 몇몇 유명한 잉크들을 작은 용량으로 구입해보았다.

    심지어 전에는 '테 뜨는 잉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몇년간 쓰고있는 펠리칸 터콰이즈도 테가 약간 뜨는 잉크라는걸 모르고 있었다)

    오묘하게 한 잉크 두 색상 같은 입체적인 느낌, 테 뜨는 잉크의 매력을 요즘 좀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나마 만년필 업그레이드 욕심은 아직까진 크게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것도 한번 시작하면 몇십만원은 우습게 훅 나갈 것 같아 모르는게 약일것 같은 느낌.

     

     

    High maintenance, 하지만 매력적인 만년필.


    만년필은 뭐랄까, 손이 많이 간다.

    일단 잉크를 매번 내 손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이 그렇기도 하지만

    종이도 아무 종이나 쓸 수 없고, 닙과 잉크와의 궁합도 (예민하다면) 고려해야 하고, 닙 관리도 신경써야 하고, 한동안 안 쓰면 세척도 잘 해줘야 한다.

    게다가 만년필만 쓰면 아무리 조심해도 손에 꼭 잉크가 묻어 있곤 한다.

    대부분 수용성 잉크다보니 물 한방울이라도 묻으면 그 부분은 싹 번져 글자가 지워지고 만다. 형광펜도 당연히 못 쓴다.

    캡이 열린채로 책상 밑으로 떨어뜨리기라도 하는 날엔 끝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리한 제트스트림이 아닌 만년필을 자꾸만 집어드는 이유는 확실하다.

    필기의 즐거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필압을 주지 않아도 종이에 닿기만 하면 펜촉 끝에서 술술술 흘러나오는 잉크, 마치 수채화 물감처럼 글자 획 하나하나에서 농도가 달리 표현되는 만년필의 매력.

    잉크의 흐름을 느끼며 글을 쓰고 있는 그 행위 자체가 재미있게 느껴져서 쓸 게 없어도 뭐라도 꺼내 쓰고 싶게 하는 매력이 있다.

    심지어 위의 귀찮은 과정들마저 일련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마치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 커피원두를 핸드밀에 넣고 손으로 달달달 돌려 원두를 가는 시간이

    귀찮기도 하지만 오히려 때론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선사하는 것처럼

    만년필을 쓰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느껴지곤 한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컨버터 꼭지를 돌려 잉크를 채우는 과정은 어딘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행위를 내가 직접 경험하고 있다는 그런 즐거움이 있달까?

    (실제론 잉크병 입구에 묻은 잉크에 손 안닿으려고 조심하느라 모양새는 좀 빠지는것 같긴 한데.. 나만 그런건가)

     

    학창시절 글씨 좀 찌끄리는걸 좋아했다거나, 큰 문구점에만 가면 두근두근 설렜던 나같은 사람이 있다면

    만년필을 선물해주고 싶다.

    손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만년필을 쓸 일이 크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람이라면 여전히 글씨를 쓰는 그 기분을 느끼고 싶어 혼자 스케줄러라도, 일기라도 쓰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나는 전부 내돈내산이지만, 나처럼 약간 문구덕후 기질이 있는 사람이 만년필을 선물받는다면 꽤나 의미깊은 선물이 될 듯.

    부담스럽게 너무 비싼 만년필이 아니라 입문용 만년필로 조금씩 만년필의 매력을 알아갈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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