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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원서 필사의 중요성, 책 내용 잘 기억하기생각 2022. 2. 17. 12:41
학교 다닐때 교수님이 필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이따금씩 필사 과제를 내주시기도 해서 소설 필사도 하고, 기독교 학교였던 덕에 성경 필사도 좀 했다.
사실 그땐 이 재미없는 노가다를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무슨 벌 받는것도 아니고 하고 의아해 했었다.
물론 글자만 의미없이 옮겨 적는건 올바른 필사라고 할 수 없다. 글씨 연습, 오른팔 혹사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문장을 머릿속에 담고 의미를 천천히 곱씹으면서, 내가 그 글을 쓴 작가의 입장이 되어 그 문장을 직접 써낸다는 생각으로 필사를 해야 진정한 필사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문장을 그대로 베끼면서 문장력도 좋아지고 글 전체를 장악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하는데
뭐,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사실 필사를 자발적으로 해 본 적은 없었다.
원래 뭔가 끼적이거나 글씨 쓰는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최근 몇년간은 책상에 앉을 일이 없었고 뭔가 펜으로 쓰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
20년이상을 써온 일기도 예전엔 다 손으로 썼지만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짧게 적는 일이 더 많아졌다.
예전에 면접 준비하던 시절에만 해도 손으로 직접 답변을 준비하고 글자 쓸 일이 많으니 만년필을 많이 썼었는데,
그 뒤로는 사실 글 쓸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미처 세척하지 못한 만년필 잉크가 굳어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일하면서는 뭐 비행 준비라던지, 혹은 레이오버에서 가끔 혼자 만년필이랑 수첩 가지고 나가 끄적거리고 싶은 날 가끔씩 사용하긴 했지만
비행하는 순간에는 무조건 호텔 볼펜만 사용했다. 고상하게 만년필 같은걸로 메모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비행을 내려놓고 현재 일을 쉬고 있는 요즈음..
잠들어있던 만년필로 갑자기 뭔가를 끄적이고 싶어졌다.
볼거 다 보고 더이상 볼 것 없는 유튜브나 괜히 어슬렁거리느니 차라리 책이라도 필사하면서 머리를 식히는게 낫지 않을까.
그래서 그냥 무작정 시작한 필사.
전에 사뒀다가 읽지 않고 처박아뒀던 책, Where The Crawdads Sing (가재가 노래하는 곳) - Delia Owens.
가끔씩 원서를 읽곤 하는데 이 책은 초반에 배경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표현이 많아서 자잘하게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첫부분만 조금 읽다 만 책이었다.
사실 내가 그런 세세한 단어를 이용한 세밀한 묘사 표현이나 onomatopoeia (의성어) 같은게 약한 편인데
책을 많이 안 읽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
그래서 더 이 책 필사에 도전을 해야겠다 싶었다. 계속 읽고 옮겨쓰고 하다보면 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행히 처음 부분만 지나니 모르는 단어가 줄어들어 금방 몰입되기 시작했고, 몇페이지씩 먼저 읽은 후에 시간이 나면 이미 읽은 앞부분을 조금씩 필사하고 있는데 필사를 하기 위해서 문장을 여러번 곱씹다보면 확실히 내용이 기억에 잘 남게 된다.
몰랐던 단어도 반복해서 쓰게 되고 문장 속에서 사용되는걸 보다보니 그냥 외우는것보다 확실히 이해되고 각인된다.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몇 달 지난 후에는 남은건 재밌었다는 인상 뿐, 내용이나 디테일은 다 휘발되어버리는건 나뿐일까?
책 뿐만 아니라 영화도 그렇다. 아무리 재미있게 봤더라도, 한번만 보면 조금만 지나도 가물가물하다.
그럴 때 책이든 영화든 감상평을 적으면 확실히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감상평을 적기 위해 한번 더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게 되고 다시 한번 내용을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밑줄 그으면서 읽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펜을 찾아서 밑줄을 긋는 행위 자체가 몰입에 방해가 되어서 그렇다.
대신 한번 다 읽은 뒤 책을 다시 한번 더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거나 하는건 책을 오래 기억하기에 좋은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필사를 한다는건 정말 확실하게 내용을 각인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작가가 썼던 문장을 내가 다시 한번 외워서 옮겨 적으면서 어떤 느낌으로 그런 글을 뱉어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만년필로 뭐라도 끄적이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하다보니 필사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처음엔 옮겨 적을 문장이 드럽게 안 외워지고, 분명 머릿속으로 내용을 이해했는데 종이에 옮겨 적으려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백지가 된다.
자꾸 머릿속에 이해한 내용을 가지고 내가 영작을 해서 내 문장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디테일을 빼먹고 서술어만 쓰기도 하고.
그런데 이걸 참고 계속 하다보면 어느순간 외워서 한번에 옮겨 적을 수 있는 문장이 늘어나는 걸 발견하게 된다.
아직까지 한 문단을 한번에 다 옮겨 적지는 못하지만, 이대로 하다보면 확실히 영어 문장을 외우는 힘도 늘어날 것 같다. 언어에 도움이 되는건 말할 것도 없겠지.
영어 소설도 그렇고 한국어 소설도 마찬가지다. 필사라는 행위는 확실히 노가다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학교 다닐 때 약간 "벌서는" 느낌으로 해야 했던 필사를 자발적으로 해보면서 필사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고, 그 효과를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필사를 취미로 쭉 이어가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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